우주의 시선으로 다시 쓰는 <어린왕자> 제11장 : 부끄러움을 잊으려다 더 부끄러워진 어른
[제11장]
어린왕자가 세 번째로 도착한 별은
작고 어두웠다.
그 별에는
빈 술병들이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었고,
아직 따지도 않은 술병들이 또 한쪽에 잔뜩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한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어린왕자는 조심조심 물었다.
❝ 아저씨, 거기서 뭐 하고 있어요? ❞
남자는 고개도 제대로 들지 않고 대답했다.
❝ 마시고 있지. ❞
❝ 왜 마시는데요? ❞
❝ 잊으려고. ❞
어린왕자는 잠깐 가만히 서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축 처져 있어서
괜히 더 물어보게 되었다.
❝ 뭘 잊고 싶은데요? ❞
남자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 부끄러운 걸 잊고 싶어서. ❞
어린왕자는 더 궁금해졌다.
❝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데요? ❞
남자는 갑자기 짜증이 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 술 마시는 내가 부끄럽다고! ❞
그리고는 다시 병을 들었다.
어린왕자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술 마시는 게 부끄러워서 술을 마신다고?
그러면 더 부끄러워질 텐데.
더 부끄러워지면 또 마실 텐데.
어린왕자는 잠깐 우주의 회로가 끊길 뻔했다.
이건 그냥 빙글빙글 도는 것도 아니고,
제자리에서 아주 열심히 자빠지는 재주 같았다.
❝ 그럼 안 마시면 되잖아요. ❞
어린왕자가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
남자는 마치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 그게 되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
그 말에는 이상하게 힘이 하나도 없었다.
화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그냥 오래 젖어버린 사람의 체념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어린왕자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걸 알았다.
술주정뱅이는 계속 마셨고,
별은 계속 어두웠다.
어린왕자는 조용히 그 별을 떠나며 중얼거렸다.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걸
꼭 자기 위로라고 믿을 때가 있네.’
⁂ 연서온의 노트 — 사람은 왜 자꾸 같은 자리로 돌아갈까
어릴 땐 이 장면이 참 이상했다.
아니, 술 마시는 게 부끄러우면 안 마시면 되잖아.
그렇게 간단한 걸 왜 저렇게 빙빙 도는 걸까 싶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니
이 장면이 하나도 남의 일 같지 않다.
사실 우리도 늘 비슷한 일을 하며 산다.
늦게까지 휴대폰을 붙잡고 있다가
다음 날 피곤해 죽겠으면서
그날 밤 또 휴대폰을 붙잡는다.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달고 짠 걸 잔뜩 먹고는
먹고 난 뒤 괜히 속상해져서
또 다른 무언가를 먹으며 기분을 달랜다.
후회하면서 또 하고,
또 해서 더 후회하고,
그 후회를 잠깐 잊겠다고 다시 같은 걸 반복한다.
정말 무서운
그게 나쁜 줄 몰라서 반복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알면서 반복한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피하고 싶었던 건
술 자체가 아니라
술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자기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초라함.
부끄러움.
공허함.
혹은 아무도 모르게 오래 쌓인 외로움.
사람은 가끔
그 감정을 직접 마주보는 대신
딴 걸 입에 넣고, 손에 쥐고, 눈앞에 틀어놓으며 도망친다.
하지만 도망은 참 이상해서
멀리 가는 것 같다가도
늘 같은 자리로 다시 데려온다.
그러니 그 끝없는 빙글빙글을 끊는 방법은
사실 대단한 결심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 나 지금 또 이러네.”
“내가 지금 좀 지치고, 좀 허하고, 좀 부끄럽구나.”
하고
그 못난 나를 들키듯 가만히 바라봐 주는 것.
그 순간부터
후회는 조금 덜 무서워지고,
반복은 조금 덜 세진다.
오늘 하루,
나는 무엇으로 내 마음을 덮으려 했을까.
괜히 다른 것 뒤로 숨기기보다
내 마음을 한번만 조용히 바라봐 주는 밤이면 좋겠다.
지우고 싶은 마음도
결국 내가 지나온 시간의 일부이니까.
Member discus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