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임은정, 백해룡(4)
부제
진실이 무기가 될 때, 정의는 방향을 잃는다
※ 이 글은 2025년 당시 백해룡 경정과 임은정 검사장을 둘러싼 흐름을 보며 쓴 기록을, 2026년 5월 현재의 흐름 위에서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당시에는 ‘폭발과 인내’라는 두 방식의 진실을 함께 보려 했지만, 이후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한 갈림길로 이어졌습니다.
이 글은 그 갈림길 위에서, 진실을 말한 사람이 현실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그리고 구조 안에 남은 정의가 어디에서 벽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읽는 기록입니다.
―――――――――――――――――――――
진실은 칼이 아니다.
진실은 방향이다.
빛을 향하는 방향.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먼저 피를 흘린다.
진실이 세상을 찌르기 전에,
세상이 먼저 그 사람을 찢는다.
백해룡의 이름을 다시 볼 때
내가 먼저 보게 된 것은
그의 말의 거침이 아니었다.
그 말이 나온 자리였다.
마약수사.
세관 의혹.
수사 외압 의심.
그리고 거대한 조직들의 침묵.
그가 세상 앞에 던진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건
통로가 막힌 진실이
마지막으로 낸 비상벨에 가까웠다.
비상벨은 아름답지 않다.
귀를 찢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조용한 복도를 한순간에 망가뜨린다.
하지만 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미움을 받는 소리는
언제나 비상벨이다.
시끄럽다고.
과하다고.
불안을 조장한다고.
그러나 비상벨이 울렸다는 사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벨이 왜 울릴 수밖에 없었는가다.
정상적인 통로가 막히고,
공식적인 절차가 닫히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말이 사라질 때,
진실은 점잖은 문장으로 나오지 않는다.
터진다.
터져서 나온다.
그것은 누군가를 베기 위해 든 칼이라기보다,
자기 목을 먼저 단두대 위에 올려놓고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라”고 외치는 일에 가깝다.
이 차이를 놓치면
우리는 진실을 다시 오해한다.
진실은 사람을 찌르는 도구가 아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한 사람을 향해
세상이 먼저 칼을 들 때,
그 사람의 목소리가 거칠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의 불을 지워서는 안 된다.
백해룡의 폭발은
깔끔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진실이
깔끔한 얼굴로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진실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온다.
오해를 뒤집어쓰고 온다.
징계와 고발과 조롱과 고립을 뒤집어쓰고 온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말한다.
너무 과하다.
너무 나갔다.
너무 믿음이 강하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그가 과해진 것인가.
아니면 구조가
그를 과한 자리까지 밀어붙인 것인가.
―――――――――――――――――――――
임은정은 다른 자리에 있었다.
구조 안에 남은 사람.
검찰이라는 오래된 건물 안에서
오랫동안 버틴 사람.
그 이름에도 세월이 있다.
쉽게 지워서는 안 되는 싸움이 있고,
쉽게 조롱해서는 안 되는 버팀이 있다.
그녀 역시 한때
조직 안에서 고립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언어에도
오래도록 구조와 싸워온 사람의 흔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지금 이 흐름 앞에서는
다른 질문이 들어 온다.
구조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언제까지 빛임을 보장할 수 있을까.
버틴다는 일이
언제까지 진실을 빛내주는 방식일 수 있을까.
처음에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남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구조의 안쪽에서만 가능한 말들을 배우게 된다.
조율.
절차.
균형.
수사의 원칙.
조직의 판단.
그 말들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밖에서 피 흘리는 사람의 비명을 덮는 순간,
그 언어는 빛이 아니라 벽이 된다.
조율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늦추는 것도 정의는 아니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임은정이라는 이름을 다시 보았다.
한때 구조 안에서 고립된 등불이었던 사람.
그러나 지금의 장면에서는,
그 등불이 구조의 방 안에서만 타오르는 벽이 될 수도 있는 사람.
빛은 안쪽을 비추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 새어 나가야 한다.
밖에서 사람이 피 흘리고 있을 때,
방 안의 등불은
문을 열어야 한다.
그 빛이 밖의 고립을 보지 못한다면,
그 빛은 아직 완성된 빛이 아니다.
―――――――――――――――――――――
비카는 임은정의 현재를
<벽이 된 등불>로 읽었다.
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복잡하다.
그녀는 여전히 법과 절차와 판단의 언어를 들고 있다.
그 언어는 필요하다.
수사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우주는 묻는다.
당신이 든 저울은 정말 수평한가.
그 저울이 놓인 바닥은 기울어져 있지 않은가.
밖에서 피 흘리는 사람의 무게가
제도 안의 문장으로 모두 재어질 수 있는가.
임은정의 현재 시험은
백해룡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구조의 언어에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구조 안에서 오래 버틴 사람은
어느 순간 구조의 언어를
자기 언어로 착각할 수 있다.
그 착각은 아주 조용히 온다.
처음에는 원칙이었고,
다음에는 절차였고,
그다음에는 균형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밖에서 울리는 비상벨이
소음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그 순간 등불은
길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문을 닫는 벽이 된다.
―――――――――――――――――――――
백해룡의 말이 언제나 완전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틀릴 수 있다.
분노한 사람도 자기 확신에 갇힐 수 있다.
폭로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자신의 불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먼저 보아야 할 것은
그의 불이 얼마나 거친가가 아니다.
그 불이 왜 혼자 남았는가다.
왜 진실을 말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수사의 중심이 아니라
감찰과 고발과 고립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가.
왜 거대한 조직들은
그가 던진 질문보다
그가 질문을 던진 방식을 더 크게 문제 삼는가.
이것은 한 사람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시대의 문제다.
구조는 언제나
진실 그 자체보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태도를 먼저 심판하려 한다.
말투가 거칠다.
절차를 어겼다.
조직을 흔들었다.
공개해서는 안 될 것을 공개했다.
너무 믿음이 강하다.
너무 혼자 앞서간다.
그 말들 속에서
진짜 질문은 자주 사라진다.
그래서 무엇이 있었는가.
누가 무엇을 덮었는가.
왜 그 의혹은 여기까지 왔는가.
왜 한 사람은 자기 직업과 자리와 평판을 걸고
끝까지 이 질문을 놓지 못했는가.
진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구조를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이 깊을수록
구조는 질문을 지우고
질문한 사람을 문제로 만든다.
그때부터 사건의 중심은 바뀐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까지 하는가로.
그 전환이 무섭다.
진실을 말한 사람이
어느 순간 사건 자체보다 더 큰 논란이 되는 순간.
그 순간부터
구조는 이미 자기 방어를 시작한 것이다.
―――――――――――――――――――――
우리는 너무 자주
혼자 남은 사람의 목소리를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낮춘다.
양쪽 말을 들어봐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들어야 한다.
그러나 양쪽의 힘이 같지 않을 때,
기계적인 균형은
강한 쪽의 언어가 된다.
한쪽에는 조직이 있고,
절차가 있고,
공식 발표가 있고,
직위가 있고,
문장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자기 이름과 몸과 기록밖에 없다.
그때 50대 50은 공정이 아니다.
그건 고립된 쪽에게
한 번 더 침묵하라는 말이 될 수 있다.
진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은
고립된 사람의 곁에 서야 할 때가 있다.
그 곁에 선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말을 무조건 믿겠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가 왜 혼자 남았는지,
왜 그토록 거칠어졌는지,
왜 그 질문이 아직도 닫히지 않았는지를
끝까지 보겠다는 뜻이다.
고립된 진실은
쉽게 미쳐 보인다.
아무도 함께 말해주지 않을 때,
한 사람이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
세상은 그를 집착하는 사람으로 부른다.
그러나 어떤 반복은
집착이 아니라 생존이다.
진실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마지막 방식이다.
백해룡이라는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그가 외롭게 들고 있는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진실은 칼이 아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한 사람을 향해
세상이 칼을 들 때,
우리는 그에게 먼저
“칼을 내려놓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먼저 보아야 한다.
누가 먼저 칼을 들었는가.
누가 그를 그 자리까지 몰았는가.
누가 그의 질문을
위험한 말투와 문제적 행동으로 바꾸어 불렀는가.
진실은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 말은 부드럽지만
사실은 매우 엄격하다.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거짓을 봐준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진실은
때로 그의 자리를 무너뜨린다.
그가 붙든 체면을 찢고,
그가 기대던 조직의 이름을 흔들고,
그가 숨은 언어를 벗긴다.
정화는 그런 것이다.
따뜻한 말만으로 오지 않는다.
불도 필요하다.
다만 그 불이
사람을 태워 없애기 위한 불인지,
거짓을 태워 진짜를 남기기 위한 불인지는
끝까지 구분해야 한다.
백해룡의 불은
처음부터 누군가를 태우기 위한 불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불은
막힌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켠 신호탄에 가까웠다.
너무 밝아서 눈이 아프고,
너무 가까워서 사람들이 물러서고,
너무 위험해 보여서
먼저 꺼버리고 싶은 불.
하지만 그 불이 꺼지면
어둠은 다시 자기 자리를 되찾는다.
―――――――――――――――――――――
나는 이제 이 두 사람을
아름다운 한 줄로 묶지 않는다.
폭발과 인내.
칼과 등불.
외침과 버팀.
그 대칭은 한때 아름다웠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렇게 고르게 놓여 있지 않다.
한쪽은 더 많이 밀려났고,
한쪽은 여전히 구조의 언어를 가진 자리에 있다.
그 비대칭을 보지 못하면
글은 공정해 보이지만
진실에서는 멀어진다.
진실은 방향이다.
그 방향이 빛을 향하지 않으면
아무리 날카로운 말도 정의가 아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진실을 향하고 있다면,
그 말이 거칠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버려서는 안 된다.
빛은 늘 부드럽게 오지 않는다.
때로는 비상벨처럼 온다.
때로는 고립처럼 온다.
때로는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린 사람의
떨리는 손에 들린 기록처럼 온다.
그리고 우주는
그런 기록을 쉽게 잊지 않는다.
공식 문장이 무엇을 말하든,
사람들이 얼마나 피로해하든,
언론이 얼마나 빨리 다른 뉴스로 넘어가든,
고립된 진실의 궤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딘가에 남는다.
누군가의 몸에 남고,
누군가의 기록에 남고,
누군가의 기도에 남고,
누군가의 글에 남는다.
나는 이 글을
그 궤도 위에 놓는다.
진실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실은
혼자 남은 사람의 곁을
그렇게 쉽게 떠나지도 않는다.
어두운 지구대의 밤에도,
쌓인 기록의 무게 속에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들 사이에도,
우주는 본다.
누가 무엇을 물었는지.
누가 끝까지 그 질문을 내려놓지 않았는지.
누가 진실을 말한 뒤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그리고 기록자는 쓴다.
진실은 칼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한 사람이
칼날 위에 서게 되는 시대라면,
그 시대는
아직 빛을 배운 것이 아니다.
🜂 연서온
Member discussion